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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7월 월례문화강좌 2013-07-10

 한국관광공사 7월 토요 월례문화강좌

- 역사를 바꾼 병자호란 -

 

한국관광공사(사장 이 참)는 (사단법인)한국의재발견과 공동으로 2013년 7월 20일(토) 오후 3시 공사 지하 1층 관광안내전시관에서 ‘역사를 바꾼 병자호란’이라는 주제로 월례문화강좌를 개최한다.

 

인조 14년(1636) 12월 10일 청군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자호란은 다음해 1월 30일 국왕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禮)를 행함으로써 마무리되었는데, 이 전쟁의 역사적 의미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이 전쟁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국왕이 출성항복(出城降服)한 유일무이한 사례이자 백제나 고구려와는 달리 출성항복을 하고도 국맥을 유지한 경우이다. 전쟁의 기간은 임진왜란보다 짧았지만 항복으로 입은 정신적 충격은 심대하였으며, 그 상처의 치유에도 오랜 시간이 소모되었다.

 

둘째, 전쟁을 앞두고 조선 내에서 제기되었던 척화론(斥和論)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지배하며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고려도 때로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 수차례 사대(事大) 관계를 변경하였지만, 예를 들어 ‘대송의리론(對宋義理論)’과 같은 방식의 사고가 존재하여 후대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셋째, 조선은 이 전쟁으로 260여 년 이상 속해 있었던 명(明) 질서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청은 몽골에 이어 조선을 복속시킴으로써 요동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일대에 독자적인 청(淸)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고, 마침내 중원(中原)마저 정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명의 영역·인구·문화를 계승한 청을 오랫동안 중화(中華)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항쟁이란 시각에서 본다면 이 전쟁은 모범적 교훈이 될 만한 긍정적인 사실, 자랑스러워할 만한 승전 사례가 거의 없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1592~1598년의 임진왜란, 1619년의 심하전투, 1627년 정묘호란의 연이은 시련을 겪은 후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발발한 병자호란의 참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전쟁 준비와 발발 과정에 대한 상세한 검토가 수반되지 않을 경우, 척화론자들을 포함한 당대인들에 대한 몰이해를 가져오기 쉽다. 이러한 오해는 패전의 원인 또는 책임론과 결부되어 국제 정세를 오판한 척화론자들, 여기에 휘둘려 나라를 국망(國亡) 직전까지 몰고 간 무능한 인조와 집권 세력이라는 통념적 설명을 초래하였다. 병자호란의 어이없고 참담한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같은 해석이 일면 타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전쟁을 수행한 당사자들이 현재 우리와는 다른 신념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한 평가이다.

 

이번 강의에서는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군사적 대응과 한계, 청의 개전 의도와 조선의 피해상, 주화(主和)·척화론의 특징과 성격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척화론자들을 대명의리에 집착하여 국제 정세를 오판하고 나라를 망친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라고 비난하거나 청에 대한 항쟁만을 강조하여 민족정기의 화신으로 성급하게 평가하기에 앞서, 조선후기라는 당대의 맥락 속에서 그들의 내면과 행위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 주 제 : 역사를 바꾼 병자호란

- 강 사 : 허태구(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일 시 : 2013.7.20(토) 오후 3시~5시

- 장 소 : 한국관광공사 지하 1층 상영관

- 대 상 : 누구나 (참가비 무료)

- 공동주최 : 한국관광공사, (사)한국의 재발견

- 참가문의 : 관광안내전화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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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20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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